작년에 만난 한 대표는 회사를 정리한 지 8개월째였는데, 아직도 신용등급이 회복되지 않아서 월세 계약조차 못 하고 있었다. "법인이랑 나랑 분리돼 있는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쓴웃음만 돌아왔다.
폐업은 늘고 있다
국내에서 투자를 받은 적 있는 스타트업의 폐업 건수를 보자. 2022년 101건, 2023년 125건, 2024년 191건. 매년 꾸준히 늘고 있다. 문을 닫은 곳의 92%가 초기 투자 단계였고 69%는 업력 3년 이하다. 시드를 받고 시리즈A 문턱에서 주저앉은 팀이 대부분이라는 뜻이다. 2025년 상반기에만 88곳이 사라졌으니, 연말이면 200건을 넘겼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폐업 자체가 아니다. 초기 기업이 망하는 건 어디서든 일어난다. 한국이 유독 가혹한 건 그 다음 단계다.
공식적으로는 없어진 연대보증
정부 발표를 믿으면 연대보증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신용보증기금, 기술보증기금 — 공공기관 보증 대출에서 법인 대표의 연대보증은 완전히 폐지됐다. 은행권 보증부대출의 비보증분도 마찬가지. 여기까진 맞다.
근데 투자 현장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들린다.
투자계약서에 'Material Adverse Effect(중대한 부정적 영향)' 조항이 슬쩍 들어간다. 회사에 큰 문제가 생기면 투자자가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고, 회사에 돈이 없으면 "이해관계인"인 창업자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구조다. 연대보증이라는 이름표만 떼어낸 거지, 대표 개인이 투자금에 묶이는 건 달라진 게 없다. VC가 이 조항 넣을 때 "표준적인 투자자 보호 조항입니다"라고 말하는 것까지가 세트다.
한 번 투자를 받았다가 실패하면 어떻게 되냐. 투자금 회수 요청이 개인에게 날아온다. 빚을 다 갚기 전까지 채무불이행자 명부에 올라간다. 신용등급은 바닥이다. 카드 발급 불가, 임대차 계약 불가, 심지어 휴대폰 개통도 막힌다. 미국의 Chapter 7처럼 법인과 개인을 깔끔하게 분리해서 정리하고 다시 시작하는 게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정부의 반창고
2026년에 나온 정책 몇 가지. 위기 징후 기업과 회생 기업에 구조개선자금 2,000억 원 공급. 서울·수원 회생법원과 협약해서 평균 처리 기간 6개월로 단축. 동종업 재창업 시 '신규 창업' 미인정 기간을 3년에서 1년으로 줄였다. 나쁘진 않다.
근데 진짜 벽은 따로 있다
회생 절차가 6개월로 줄어도, 그 6개월 동안 대표 이름으로 된 금융 거래는 사실상 멈춘다. 가족 생계에 직접 타격이 간다. 게다가 절차가 끝나고 나서도 신용등급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데 2~3년이 더 걸린다. 법적으로는 회생이 끝났는데 경제적으로는 회생되지 않는 기묘한 시차가 생긴다. 전세 계약을 못 하고, 아이 학원비를 카드로 못 긁고, 배우자 명의로 모든 걸 돌리면서 사는 시기가 수 년째 이어진다.
여기에 업계 분위기가 겹친다. 한국 VC 생태계는 좁고 소문은 빠르다. 회사를 정리한 대표가 새 팀을 꾸려서 IR을 돌면, 심사역들 사이에서 "전에 한 번 말아먹은 사람"이라는 태그가 먼저 따라붙는다. 실리콘밸리에서 'serial entrepreneur'가 훈장처럼 통하는 것과 정반대다. 여기서 재창업은 용기가 아니라 무모함으로 읽힌다.
재도전성공패키지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실패 경험을 가진 재창업자를 위한 정부 지원인데, 이걸 신청하는 행위 자체가 "저 한 번 실패했습니다"를 공식 선언하는 것과 같다. 필요한 사람은 많은데 손 드는 사람이 적은 이유가 바로 이거다.
반창고 수요만 늘린다
지금 나오는 정책들은 이미 넘어진 사람에게 일어설 시간을 조금 더 주는 정도다. 안 하는 것보단 낫지만, 넘어뜨리는 구조를 그대로 두면 반창고 소비량만 계속 는다.
투자계약서 표준 약관에서 MAE 조항을 통한 우회적 개인 책임 부과를 명시적으로 제한하거나, 최소한 공시 의무라도 붙여야 한다. 회생 절차 완료 시 신용등급을 즉시 일정 수준으로 복원하는 패스트트랙도 필요하다. 법적으로 끝난 일이 경제적으로 3년째 안 끝나는 상황은 제도 설계의 실패다.
VC 업계의 인식 전환? 정책으로 되는 게 아니다. 실패를 겪은 창업자가 다시 만든 회사가 성과를 내는 사례가 쌓여야 비로소 움직인다. 근데 앞의 두 가지가 안 바뀌면 재창업 시도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사례가 나올 수가 없다. 전형적인 닭과 달걀이다.
2024년에 191개 팀이 사라졌다. 그 대표들 중에서 다시 시작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정확한 통계는 없다. 주변에서 체감하는 대답은 하나다.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