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분기 벤처 투자가 55% 성장했다는 뉴스가 돌았다. 2조 1,784억 원. VC 파트너들이 다시 명함을 돌리고, 데모데이에 사람이 몰리고, "올해는 좀 다를 거야"라는 말이 슬슬 나온다. 숫자만 보면 시장이 살아나는 것 같다.

근데 그 숫자를 한 꺼풀만 벗기면 풍경이 완전히 다르다.

6,400억이라는 무게

리벨리온이 3월 말에 닫은 프리IPO 라운드가 6,400억 원이다. 국민성장펀드 2,500억, 산업은행 500억, 미래에셋 중심 민간 3,400억. 기업가치 3.4조를 인정받았고 'K-엔비디아'라는 수식어까지 붙었다.

이 딜 하나가 1분기 전체 투자 금액의 약 30%다.

빼 보자. 237건에 약 1조 5,000억. 전년 동기 1조 4,000억과 비교하면 사실상 제자리걸음이다. 55% 성장이라는 헤드라인은 리벨리온이라는 단일 변수가 만들어낸 통계적 착시였다. 한 회사의 메가딜이 전체 시장의 기분을 바꿔놓은 셈인데, 그 기분은 현실이 아니다.

건수가 말해주는 진짜 온도

더 불편한 숫자가 있다. 건수 238건. 전년 동기 대비 17.4% 감소.

금액은 늘었는데 건수는 줄었다. 해석은 하나다 — 돈이 소수 회사에 몰리고 있다. VC들은 새로운 베팅보다 기존 포트폴리오 후속 라운드, 또는 상장 직전 프리IPO에 집중하는 중이다. 프리IPO 건수만 전년 대비 33% 늘었다. 빠르게 넣고 빠르게 회수하겠다는 의도가 노골적이다.

초기 창업자의 체감 온도는 이 헤드라인과 정반대다. 시드 미팅은 안 잡히고, VC는 "조금 더 트랙션을 보고 싶다"를 반복한다. 양쪽 다 그 "조금 더"에 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대화를 계속한다. 작년 하반기에 시드를 시작해서 아직 클로징 못 한 팀이 주변에 한둘이 아니다. IR 자료는 이미 다섯 번째 버전인데, 달라진 건 상대방의 무응답뿐이다.

두 개의 시장

1분기 AI 관련 펀딩: 52건, 9,838억 원. 전체 금액의 45%를 넘긴다. 그 외 영역은 186건에 약 1조 2,000억. 건당 평균을 내면 AI 쪽 189억, 나머지 64억. 같은 벤처 생태계 안에서 3배 차이가 난다.

생성형 AI, 파운데이션 모델, AI 반도체. 이 세 키워드 없이 100억 이상 라운드를 닫기가 극도로 어려운 구조다. SaaS, 커머스, 에듀테크 쪽에서도 간간이 소식이 들리지만, 밸류에이션 협상에서의 교섭력이 2년 전과는 차원이 다르다. "우리도 AI 쓰고 있어요"로는 안 되고, 그것이 사업 모델의 핵심 경쟁력이라는 걸 데이터로 증명해야 대화가 시작된다.

리벨리온의 밸류에이션을 한번 보자. 기업가치 3.4조에 작년 매출 350억. PSR 약 97배. 자본시장이 미래를 사는 건 당연하다. 다만 이 멀티플은 "AI 반도체는 절대 안 틀린다"는 컨센서스 위에 서 있고, 컨센서스가 깨질 때 그 충격은 한 회사에 그치지 않는다. 관련 생태계 전체가 흔들린다. 2022년 쿠팡 주가 급락이 이커머스 자금 흐름 전반을 얼려버린 것과 같은 메커니즘이다.

생존 전략이 갈린다

AI가 아닌 영역에서 창업했다면, 데크에 억지로 AI를 끼워넣는 건 답이 아니다. 차라리 VC 의존도를 줄이는 쪽이 현실적이다. 정부 지원사업이 508개 돌아가고 있다. TIPS, 창업도약패키지, 팁스타운 같은 프로그램으로 6개월에서 1년치 런웨이를 확보하는 건 이 시장에서 굴욕이 아니라 전략이다.

AI 영역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자금은 몰리는데 기대치가 같이 올라갔다. 6개월 전에는 프로토타입만으로 시드를 닫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유료 고객 다섯 이상, MRR 우상향 추세, 기술적 해자에 대한 명확한 설명까지 요구하는 심사역이 늘었다. 자본이 몰리는 섹터일수록 허들도 비례해서 올라간다.

어느 쪽이든, 런웨이 계산을 다시 해야 한다. 18개월이 아니라 24개월 이상. 라운드 클로징까지 걸리는 체감 시간이 반년은 늘어났다. 팀 사이즈를 줄이든, 매출을 더 빨리 만들든, 현금이 바닥나기 전에 다음 선택지를 확보해두는 수밖에 없다.

누구의 회복인가

"시장 회복"이라는 기사 제목이 돌 때마다 같은 질문이 떠오른다. 누구한테 회복이냐고.

리벨리온에겐 축제다. 국민성장펀드 1호 대상, IPO 로드맵 선명, 'K-엔비디아' 타이틀. 그런데 강남 위워크에서 3명이 PMF를 더듬고 있는 팀한테는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다. 건수 17% 감소라는 숫자가 그 팀의 현실을 더 정확하게 반영한다.

55%라는 숫자에 안심하지 마라. 그 안에 당신 자리는 없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