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 라운드를 닫은 날, 대표는 팀에게 소주를 돌렸다. 15억. 18개월치 런웨이. 축하할 일이었다. 그런데 정확히 다음 날부터 새로운 불안이 시작됐다. 시리즈A. 이건 내가 세 번 들은 이야기고, 아마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매주 반복되는 이야기다.
갭이 문제다
2026년 3월까지 한국 스타트업에 4.82억 달러, 63건의 투자가 집행됐다. 정부 지원금만 3조 4,645억 원으로 역대 최대 규모. 숫자만 보면 돈이 넘친다. 그런데 이 돈의 대부분은 양쪽 끝에 몰려 있다 — 초기 지원(예비창업패키지, 시드 라운드)과 후기 성장(시리즈B 이후, 대기업 CVC). 가운데가 비었다.
시드에서 시리즈A까지, 보통 12~24개월. 이 구간에서 요구되는 것들이 완전히 달라진다. 시드는 팀과 비전으로 받을 수 있다. 시리즈A는 숫자를 내밀어야 한다. PMF, 월 매출 성장률, 고객 유지율, 유닛이코노믹스. "가능성"의 세계에서 "증거"의 세계로 건너가는 건데, 다리가 없다.
KoreaTechDesk가 최근 짚은 것처럼, 한국의 "성장 사다리"는 바로 이 구간에서 끊겨 있다. 초기 창업부터 벤처 투자, 스케일업 경로까지 이어져야 할 사다리에 가운데 몇 칸이 빠져 있는 셈이다.
70%가 여기서 죽는 이유
스타트업 실패 통계에서 반복되는 숫자가 하나 있다. 제품과 플랫폼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장을 시도해 실패하는 비율: 70%.
조기 스케일업. 영어로는 premature scaling. 이름은 그럴듯한데 현실은 이렇다:
시드를 받았다. 런웨이 18개월. 시리즈A 투자자를 만나면 "MoM 20% 성장" 보여달라고 한다. 역산하면 지금 당장 유저 획득에 돈을 써야 한다. 그래서 마케팅비를 태운다. 유저는 들어오는데 리텐션이 안 잡힌다. PMF가 없으니까. 그래도 지표를 만들어야 하니까 프로모션을 더 세게 건다. 12개월째, 런웨이 6개월 남았고, 지표는 "마케팅을 끊는 순간 0이 되는" 종류다. IR 덱에 올릴 수 있는 그래프는 예쁜데, 그 그래프의 기반이 모래 위에 있다는 걸 대표만 안다.
이게 한국 시드 스테이지에서 가장 흔한 사망 패턴이다.
한국 특유의 사정이 이걸 더 악화시킨다. 첫째, 시드 라운드 규모 자체가 작다. 5억15억이 일반적인데, 미국 시드는 $2-5M, 그러니까 3070억이 기본이다. 런웨이가 짧으니 "천천히 가설을 검증하겠다"는 건 사치에 가깝다. 빨리 지표를 만들고, 빨리 다음 라운드를 열어야 한다. 이 속도 압박이 조기 스케일업의 온상이 된다.
둘째, "빠른 실행"을 미덕으로 보는 문화. 빠르게 만들고, 빠르게 출시하고, 빠르게 지표를 끌어올려라. 초기에는 이게 강점이다. 그런데 PMF를 찾기 전에 마케팅 예산을 쏟아붓는 결과로 이어질 때, 그 속도는 독이 된다. 방향이 틀린 상태에서의 속도는 절벽을 향해 더 빨리 달리는 것과 같다.
정부의 처방
중기부도 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 올해 정책의 핵심은 성장 사다리 복원. AI 전환 기업에 대출 한도를 60억에서 100억으로 늘린 AX 스프린트 트랙, 수요자 중심 지원 구조 전환. 방향 자체는 읽힌다.
근데 대출로 PMF가 생기나
시리즈A에서 탈락하는 스타트업 대부분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PMF가 없어서다. 대출 한도를 올려주면 런웨이는 늘어나지만, 시장이 원하지 않는 제품을 시장이 원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시간을 더 벌어줄 수는 있어도, 그 시간 동안 뭘 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창업자의 몫이다.
최근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조사에서 창업자의 42.5%가 올해를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2022년 이후 최고 수준의 낙관론. 그런데 이 낙관이 오히려 위험 신호일 수 있다. 돈이 풀리면 "일단 해보자"가 늘어난다. "일단 해보자"의 상당수는 18개월 뒤 "왜 했을까"가 된다. 경험 많은 VC 심사역들이 사적인 자리에서 하는 말이 있다 — "시장이 좋을 때 시드 받은 팀이 가장 위험하다."
결국 핵심은 시드 이후 시리즈A까지를 "빠른 성장 구간"이 아니라 "가설 검증 구간"으로 재정의하는 것이다. 매출 그래프가 하키스틱을 그리기 전에, 고객 10명이 진짜로 돈을 내고 반복 구매하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그 10명이 없으면 시리즈A 문을 두드릴 자격 자체가 없다.
돈은 넘친다. 부족한 건 인내심이다.